배째라 정예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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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ewon Jeong

1.

집안일 후 꿀저녁

집안일 하는 시간은 평온함을 가져다 준다.

귀에 법문이든 좋아하는 노래든 꽂아놓고, 이불 빨래도 하고 화장실 청소도 하고, 바닥도 닦고 환기도 한다.

내가 특히 좋아하는 것은 건조된 빨래를 차곡차곡 개는 것이나 화장실의 묵은 때를 벗겨내는 것이다. 수도꼭지에 빛이 나고 옷들이 정갈하게 개어지는 모습을 보면 나도 덩달아 맑아지는 느낌이랄까?

그렇게 잘 개어 놓은 옷을 입을 때면 기분도 좋고!

그리고 한층 깔끔해진 방에 누워서 쉬면 청소 안 된 방에서 지낼 때보다 생각도 좀 더 생산적으로 흘러가는 것 같다.

이 흐름을 이어서 내일은 어떤 일을 해볼까, 어딜 가볼까, 이번 달엔 뭘 배워볼까 이런 궁리를 하면서.

물론 이런 발전적인 생각이 도가 지나쳐 강박적이라고 느껴질 때는, 부러 폭식도 하고 방에 과자 봉지도 널브러 뜨려 놓고 머리카락들이 밟히는 방에서 지낼 때도 있다.

그것이 나만의 중화 방법이다. 원체 자기통제를 많이 하는 나이기에 유도리를 부리며 살아줘야 작은 거에 툭 하고 부러지지 않는다.

뭐든 흐름이라는 것이 있어서, 또 그렇게 암것도 신경 안쓰는 듯 대충 대충 늘어져서 사는 동안에는 거기서 에너지 절약이 굉장히 많이 된다는 장점이 있다.

그렇게 그 에너지가 어느 정도 모이면 문득 한 숨에 일어나 집안의 묵은 먼지를 탈탈 털어버리고 또 새로운 리듬으로 재밌고 성실한 삶을 살 준비가 되는 것이다.

우울증에 걸린 사람들은 널부러진 물건 정리할 힘도 없을 때가 많다는데 그 말이 정말 맞다. 몇 년 전과 비교하면 일주일에 한번은 꼬박 꼬박 청소하며 지내는 나를 보고 힘이 많이 생겼구나 그런 생각이 든다.


2.

오늘은 아주 오랜만에 롯데월드타워 위니비니 젤리가게에서 젤리를 사먹었다.

원래 교보문고 가면 책은 안 읽고 위니비니에서 젤리 사서 집 가는 길에 다 먹어버리는 게 내 낙이었는데 아주 오랜만에 딱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햇수로는 십 년은 차이 나는 것 같은데 그 때 마냥 신중히 최대한 많은 맛을 맛보려고 한 종류 한 종류 조금씩 집중해서 담는 나를 보며 참 한결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ㅎㅎ 다만 지금은 그 때 보다 더 많이 담을 수 있는 으른이 된 것 같다는 점…?!

(게다가 딱 만 원 정도가 나왔는데 만 원 짜리 상품권이 있어서 마치 공짜같은 느낌으로 사먹었다!)

집에 와서 한번에 그 많은 젤리를 다 먹고 나니 너무 달아서 오바했나 후회와 걱정이 살짝 들었지만

“하루 정도 이럴 수도 있지. 무지 오랜만이니까”

“오랜만에 젤리 실컷 먹으니까 좋다”

“내일부터 좀 더 건강한 선택을 해봐야지”

하고 가볍게 넘기기로 했다. 그것이 나에게 엄청난 발전이다!

왜 그랬어 그러지 말았어야 하는데 왜 또 그랬어. 이것도 잘못하고 저기서도 잘못 했네.

이런 류의 사고방식이 너무 일상적이었던 나는 스스로의 날카로운 채찍질에 자주 넉다운 되어서 어둠 속에서 지내는 날이 많았는데 이렇게 힘뺀 배째라 마인드가 나에게 필요하다고 느끼게 된 후로 이렇게 생활 속에서 자주 ‘배째라 이미 지나간 일이야’를 시전하고 있다.

‘어제는 끝났고, 내일은 멀었고, 오늘은 아직 모른다’

ㅡ미지의 서울

위니비니 + 뷰튜버 ㅋㅋ

3.

화장품을 다루는 사회 학교에 있게 되면서, 생전 사려고 생각도 안해본 컬러와 질감과 종류의 화장품들이 집에 무지 많아졌다!

누디립도 질감별로, 스모키 메이크업 섀도우, 진한 아이브로우 펜슬, 이상하고 신기한 제형의 파운데이션, 레드립도 온도별로 .

요즘 매일 다른 컨셉으로 나를 표현하는 것에 흥미를 느끼게 되면서 무난하고 남들 눈에 괜찮아 보이는 것 말고도 요상하고 신기한 컬러도 거부감 없이 써보고 있는데,

이번에 받은 화장품들로 직접 손목에 발색도 해보고 섀도우랑 어울리는 립도 조합해보는데 재미있었다. 이 컬러와 이 컬러가 섞이면 이런 느낌을 낸다니! 하면서…

제품을 직접 써보면서 뷰티유튜버들 리뷰 영상과 비교해 보니 아 이런 느낌을 이렇게 말하는 구나 하고 알게 되기도 하고.

내가 화장품 브랜드에 있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는데, 화장품 중에서도 탑클래스 브랜드 제품을 종류별로 다 써보게 될 줄은 더더욱몰랐다.

하늘 아래 같은 레드 없다고, 색감도 미친 듯이 다양하고 펄 입자도 어쩜 그렇게 고운지.

어떤 화장품이 좋고 나쁜지에 대한 경험은 별로 없었지만 입술에 착 감기는 쫀득한 립스틱과 차르르 떨어지는 고운 펄의 섀도우를 매일 보다 보니 다른 화장품들을 썼을 때 왠지 둔탁하다는 느낌이 들었는데, 이러면서 안목을 기르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경험이 어떻게 쓰일지는 잘 모르겠지만 일단 재밌으니까 재밌는대로 가보는 중이다.

사회 학교를 주시는 것 마다 전부 고급스러운 것들을 보고 좋은 안목을 기르게 해주시는 환경에 감사해야 할텐데. 늘 감사를 잊는다.

25.10.04~10.10 일지

25.09.27~10.03 일지